90년도 초에 내가 제일 좋아하던 청바지브랜드다. 특이한 디자인 맘에 들었었는데 언제가부터 보이질 않는다. 지금도 낡은 티 몇장이 내 옷장에 있다. 갑자기 궁금해서 검색을 해보았는데. 잼나는 글을 찾았서 스크랩해왔다. 청바지에대한 나의 생각과 저버의 생각이 같다는 것이 기분이 좋아진다. 참 켈번에<2010/09/16 - [DesignStories/Styling] - 가을에 괜찮은 가죽조끼> 조성은실장님도 그곳에 근무했었는데 그분이 디자인한 반바지가 넘 맘에들 허리밴드가 끈어질때까지 입다 나이살이 들어 못입게된 기억이 난다.ㅎㅎ  



마리떼+프랑소와 저버(Marithe Francois Girbaud)를 만난 게 지난 7월 13일입니다. 아, 정말이지 인터뷰가 재밌어서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흥분을 누르기 힘들었습니다.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는 1990년대 초중반 정말 잘 나가는 브랜드였죠. 우리나라에선 IMF때 이후 철수했지만, 지금도 유럽에선 무척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브랜드입니다. 저 역시 친구가 'Marithe Francois Girbaud'란 글씨가 새겨진 청바지를 입고, 거만하게 티셔츠는 앞에만 집어넣고 뒤는 길게 빼고(당시 유행 스타일- -) 나왔을 때 "워......" 하며 감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푸하하.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는 이렇게 저한텐 장동건이 입고 다녔던 청바지, 옷 잘 입는 친구가 즐겨 입던 청바지, 그리고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그들이 온다"라고 성우가 근엄하게 읖조리던 라디오 광고 CM 정도로만 각인된 브랜드였습니다. 정말 뒤늦게 알았죠. 이들 디자이너가 여자에게 청바지를 거의 처음으로 입혔고, 스톤워싱과 인디고 데님을 처음으로 개발했고, 배기진과 엔지니어 진을 발명한 주인공이란 사실을요. 그야말로 이들은 패션계에서도 남들이 가보지 않은 길만 골라 밟은 개척자(pioneer)였던 겁니다.

13일 오후 3시 무렵. 서울 에스모드 사무실에서 마리떼와 프랑소와 저버를 만났습니다. 두 사람은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이쪽으로 와서 짐을 풀고 옷을 갈아입고 바로 나온 상태였습니다. 당연히 무척이나 피곤했겠죠. 그런데도 제가 "사진 먼저 찍는 게 어떨까요?"라고 하자, 프랑소와 저버(65)는 벌떡 일어나 갑자기 에스모드 전시회장에 있던 사다리를 타고 다다닥 올라갔습니다. "이걸 찍으시면 어때요? 이게 재밌지 않나요?" 하면서요.


아, 그 활기 넘치는 표정과 움직임이라니! 우리 회사에서 가장 사진을 재밌게 찍는 친구인 이태경 기자는 그가 그렇게 통통 튀는 모습으로 사다리에 올라가자 덩달이 신이 난 듯 했습니다. "좋아요! 좋아요! 네 거기 계세요!" 외치며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더군요.

프랑소와 저버는 사다리에서 내려와 이번엔 에스모드 학생들이 만든 데님 의상을 껴안고 휘휘 돌았습니다. 갑자기 바닥에 벌렁 눕기도 하고 학생들이 만든 옷 사이에 숨어 얼굴만 빼꼼 내놓기도 하더군요. 이태경 기자가 "와, 저분 진짜 포토제닉해요!"라고 외칠 정도였죠.


역동적인 사진 촬영이 끝나고 프랑소와 저버와 마주 앉았습니다. 그 옆엔 마리떼가 앉아 노트북을 켜놓고 뭔가 작업을 하더군요. 순간 정말 궁금했어요. 브랜드 이름도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이고, wikipedia 같은 델 뒤져봐도 두 사람은 'wife and husband'라고 나오는데, 그럼 역할 분담은 어떻게 하는 걸까. 두 사람은 디자인도 같이 할까. 아니 결혼은 언제 했을까.

그래서 참지 못하고 물었습니다. "두 분 역할 분담은 어떻게 하시죠? 결혼은 언제 하셨나요?" 라고요.

이때 프랑소와 저버가 들려준 대답에 전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제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마드모아젤, 난 그 질문을 세상에서 젤 싫어하오." "엥? 아니, 왜요?"

"우리가 부부인지, 아닌지, 결혼을 했는지는 그야말로 부르지아적 관점에서 묻는 질문이라오.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부부냐고 묻는데, 난 거기에 대해 어떤 말도 하기 싫소. 다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요. 부부는 법적으로 혼인신고를 하고 함께 방을 쓰다가도 이혼하면 그만인 사이지만, 나와 마리떼는 부부보다 더 오래 서로를 알아왔고 함께 아이디어를 나눴고 사랑 이상의 의리와 신의를 나눈 사이오. 우린 젊은 시절 열정이 식고 애정이 사라졌다고 헤어지는 관계가 아닌, 평생 서로를 지지하고 도와주는 동반자요. 그러니 우리에게 결혼했느니 안했느니 언제 했느니 하는 질문은 그만 하시오. 그리고 하나 더 말해주자면, 내가 어떻게 하면 더 혁신적인 옷을 만들지 고민하고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라면 마리떼는 그걸 상업적으로 어떻게 풀고 유통시키고 전개하는지를 고민하는 쪽에 더 가깝소."

!!! 느낌표 세 개. 그 순간 비로소 이해가 되더군요. 이들이 추구하는 패션과 철학이 대체 무엇인지. 이들은 함께 옷으로 세상을 전복하고 싶었던 겁니다. 1950년대 후반, 처음 회사를 만들고, 1960년대부터 급진적인 청바지를 만들어왔던 두 사람 아니던가요. 고개가 절로 끄덕끄덕. 질문을 계속 했습니다.


"근데 왜 청바지죠?"

저버는 빙그레 웃었습니다. "청바지는 가장 부르주와지와 먼 옷이었으니까. 물론 지금은 미국 프리미엄 진 때문에 자본주의의 표상이 됐지만. 우리가 처음 청바지를 만들 때만 해도 청바지는 노동자나 입는 옷이었소. 광부나 입는 옷이었지. 우린 그 옷을 다듬어 여자들에게도 입혔소. 이른바 '섹시진'이지. 성의 개방, 섹슈얼리티의 해방을 옷을 통해 주장하고 싶었던 거지요. 그 다음엔 스톤워싱진을 만들었소. 옷에 물을 빼서 청바지를 얼룩덜룩하게 만드는 거지. 기존과 전혀 다른 옷이었고, 그 옷을 입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반항과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이었소."

 
"그런데 왜 지금은 스톤워싱진을 안 만드시죠?"

"스톤워싱진은 내가 만든 악마의 발명품이니까! 스톤워싱진을 처음 만들 때만 해도 모든 브랜드가 이를 따라할 거라곤 상상도 못했소. 얼마 안가 스톤워싱진은 전 세계를 휩쓴 상품이 됐는데, 이 청바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공장에선 수십톤의 물을 써서 강으로 버렸고, 강이 오염되고 세계 환경이 망가지기 시작했지. 맙소사, 내가 만든 옷 때문에 전 세계 강물이 병들기 시작한 거요. 난 그래서 레이저 워싱, 와트워싱을 개발했소. 물을 덜 덜이고 염색을 하는 방법이오."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 바지가 미국 프리미엄 데님이랑 다르다고 하셨지만, 1990년대 초반엔 한국에서 80만원 가량에 팔린 적도 있는데, 그 사실을 아시나요?"

(이 말에 저버는 눈을 크게 떴다) "난 그렇게 비싼 옷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오. 난 언제나 합리적인 가격의 옷을 추구하고, 값비싼 디자이너 브랜드가 되는 덴 관심이 없소. 유통과정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랬다면 그건 명백한 잘못이오. 다시 한국에 진출한다면 그렇게 터무니없는 가격에 청바지를 파는 일은 없을 거요."

그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내 옷은 여전히 거리의 옷을 지향하오. 거리의 젊은이들이 자신의 개성과 영혼을 온몸으로 표현하기 위해 고르는 그런 옷. 난 갑부가 입는 옷엔 관심 없소. 앞으로도 계속 옷으로 혁명을 꿈꿀 것이고, 부르주와 계급이 만들어낸 제도와 편견을 거부하는 패션을 창조하고 싶소."

탁구공을 튀기는 것만 같은 인터뷰. 인터뷰를 하는 1시간 동안 즐겁고 또 짜릿했습니다. 이런 철학을 가진 디자이너와 얘기를 나눌 수 있다니, 기자란 직업이 참 좋다는 생각이 새삼 들기도 했고요.


아래는 그렇게 프랑소와 저버와 나눈 대화를 정리한 기사입니다.


"값비싼 청바지 시대는 이제 끝났다"
송혜진 기자
enavel@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입력 : 2010.07.16 03:02
'청바지계의 대부' 디자이너 프랑소와 저버
60~80년대 스톤워싱·배기 진 등 발명…
"수십만원짜리 바지에 질린 사람들에게 '거리의 옷' '청춘의 옷'을 돌려줘야"
"물 소비 적은 청바지로 다시 혁명 꿈꿔"

이들은 여전히 청바지의 소명(召命)을 믿는다. 수십만원짜리 프리미엄 진이 득세하고, 청바지 상표가 신분의 상징인 시대. 언제부터 청바지가 이런 자본주의적 욕망의 화신이 된 걸까. "내가 꿈꾸던 청바지는 거리의 옷이었고, 변혁의 옷이었다. 그리고 우린 아직 그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청바지계의 대부'로 불리는 프랑스 디자이너 마리떼·프랑소와 저버(Marithe·Francois Girbaud). 1990년대 한국에선 장동건이 '우리들의 천국' 등에 입고 나와 불티나게 팔렸던 바로 그 청바지,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를 만든 주인공이다.

이들이 지난 13일 패션교육기관 '에스모드 서울'의 패션 학도들이 만든 새로운 청바지를 품평하기 위해 한국을 찾아왔다. 학생들의 옷을 살펴본 프랑소와 저버(65)는 이렇게 말했다. "좀 더 대담해져도 된다. 혁명은 이제 겨우 시작이니까."

▲ 소신있는 언행으로 유명한 디자이너 프랑소와 저버. 13일 만난 그는“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말을 듣자마자‘에스모드 서울’학생들이 만든 데님 작품 앞에 벌렁 드러눕는 포즈를 취했다.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스톤워싱 진, 배기 진, 인디고 진, 엔지니어드 진…. 이 모든 게 당신의 발명품이라고 들었다.

"1967년 스톤워싱 진을, 1978년 처음으로 배기 진을 만들었다. 리바이스가 히트시킨 엔지니어드 진은 1988년 내가 만든 메타모포 진(Metamorphojean:변형진)을 대량상품화한 것이다. 가난한 뒷골목에서 자란 난 돈 많은 사람들을 위한 근사한 옷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성의 해방, 사회 변혁의 표현, 억눌린 이들의 자아를 옷으로 표출하는 게 내 목적이었으니까. 그래서 옷을 빨고, 찢고, 구기고, 늘어뜨렸다."

―청바지를 미국 자본주의의 그늘에서 해방하겠다고 주장했던 적도 있다.

"흔히 청바지를 미국 서부 문화의 상징으로 본다. 물론 청바지의 시작은 미국 광부를 위한 옷이었다. 하지만 1960년대 마리떼와 나는 청바지에 유럽 혁명의 정신을 입혔다. '섹시 진'이란 제품을 내놓고 여자도 청바지를 입을 수 있음을 보여준 것도, 미국과 전혀 다른 옷임을 선언하기 위해 스톤워싱 기법을 도입한 것도 이때부터다. 그 변혁 정신이 미국에서 쏟아지는 프리미엄 진의 득세로 희석된 게 안타깝다. 아시아 디자이너들이 분발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떻게 노력해야 할까?

"동양인이 만들었다는 사실을 보자마자 알 수 있는 청바지, 누가 봐도 혁신적인 디자인의 청바지를 내놔야 한다. 아직도 아시아 디자이너들은 미국과 유럽의 디자인을 재해석하고 살을 붙이는 데만 만족한다."

―이번에 학생들의 작품 중엔 한지사(닥나무 종이와 실크 등을 혼합한 실(絲))로 만든 청바지도 여럿 있었는데?

"시도는 좋다. 하지만 그걸론 부족하다. 한지사로 만들었다는 걸 강조해봤자 디자인이 압도적이지 않다면 무슨 소용인가. 옷은 철저히 디자인 그 자체로 웅변해야 한다."

―최근엔 스톤워싱 기법 대신 '와트워싱(Wattwashing)' 기법을 내놨는데.

"1960년대 말엔 청바지 염료를 빼서 얼룩덜룩하게 만드는 것으로 또 다른 시대가 왔음을 알리고 싶었다. 젊은 층의 반향도 뜨거웠다. 하지만 40여년이 지난 지금, 난 이 발명품을 저주한다. 이 스톤워싱 바지 하나를 만들려면 150L의 물이 든다. 패션이 전 세계 강을 오염시키는 뜻밖의 결과를 낳은 셈이다. 고심 끝에 5L의 물만으로도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와트워싱을 개발했다. 두 번째 혁명을 꿈꾸는 이유다."

―다시 한국에 진출하려고 한다고 들었다.

"프리미엄 진 시대는 이제 끝나가고 있다. 수십만원짜리 나태한 청바지에 질린 이들에게 다시 거리의 옷, 청춘의 옷을 전파하겠다. 몇 년 전 여자를 껴안고 호텔로 들어서는 러시아 갑부가 내가 만든 청바지를 입은 걸 보고 충격받은 적도 있다. 하지만 우린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한국의 젊은 패션 학도들도 좀 더 공격적으로 꿈꿨으면 좋겠다."

<source : enavel의 '심야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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