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현대차 포니(Hyundai Pony) 이야기를 하나 스크랩했다. '이대리의 노트'가 궁금해다.                                                           
여기서 이대리는 현대차 사장을 지내셨던 대한민국 자동차신화의 주인공 이충구님이라고 하는데 .. '이대리의 노트'가 한번 보고싶다.

현대자동차 포니 Hyundai pony 1974년
故 정주영회장의 1937년 복흥상회라는 쌀가게를 시작해 1940년 아도서비스,1946년 4월 현대자동차공업사라는 자동차정비소로, 현대그룹은 이후 건설과 조선업을 거쳐 1967년 현대자동차를 설립하게 됩니다.

현대차의 첫 기술협력선은 포드로 당시 포드는 한국에 진출할 목적으로 여러 협력회사를 물색하고 있었는데 정주영 회장의 자동차지식을 보고 바로 계약했다고 합니다. 포드는 자본참여와 경영지도를 원했지만 정주영 회장은 부품만 공급해주면 알아서 하겠다며 경영에 대한 간섭은 거부합니다.

1968년 6월에 기술도입계약을 끝내고 11월에 코티나를 시작으로 1969년 5월에는 고급 중형 세단 포드 20M, 트럭등을 도입 생산하면서 재미를 보던 현대는 1973년 포드와 합작투자 계약이 결렬되게 됩니다.

현대는 포드와 제휴하여 승용차 및 상용차

더구나 정부에서 자동차육성계획을 발표하는데 그 내용은 2천달러 이하의 국민차를 개발하고 73%의 국산화 계획을 제출하지 못하는 회사에게는 부품수입에 필요한 외화를 쓰지 못하게 하는 조치였습니다.

이는 자동차회사들의 부품수입으로 수 많은 외화가 유출되느라 정부가 결정을 내린것이었습니다. 만약 이런 조치가 없이 수입한 부품으로 조립만하는 수준에서 한국 자동차산업이 머물렀다면 엄청난 외화가 매년 유출되었을 거라는건 쉽게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물러날곳이 없던 현대자동차는 독자적인 고유모델이 있어야 함을 깨닫고 고유모델 개발을 추진하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국내시장은 연간 승용차 수요가 2만대 미만인데다 자본금 17억짜리 회사가 투자금 300-400억원이 넘는 개발및 건설비용, 5만대는 팔아야 수지타산이 맞는 엔진공장 건립등 누가봐도 가망성이 안보이는 무모한 계획으로 반대의견이 거셌으나 이미 자동차와 엔진 국산화에 마음을 굳힌 정주영회장의 결단으로 독자모델 개발을 추진하게 됩니다.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현대의 런던사무소에서 이탈리아에가면 자동차를 개발해주는 업체가 많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故 정세영 사장은 1973년 봄 이탈리아로 건너가 피닌파리나, 베르토네, 이탈디자인등과 접촉한 결과 새차 디자인과 전반적인 차량 설계는 이탈디자인. 엔진, 트랜스미션, 액슬등은 일본 미쓰비시와 기술제휴를 하게 됩니다.










포니를 개발하면서 현대가 얻은 중요한 교훈은 이탈디자인에 단순히 외주를 주고 끝난게 아니라 5명의 엔지니어를 파견해 어깨너머로 자동차제작의 핵심기술을 배워왔다는 것입니다.(이 대리 노트의 일화)

이 교훈을 바탕으로 훗날 엔진개발등 핵심기술 개발에 엔지니어를 파견해 기술을 직접 배워오게 함으로써 자체기술을 효과적으로 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완성된 포니옆에 샤시와 파워트레인을 빌려온 미쓰비시의 초대 랜서

국민차 개념을 위해 5인승을 기본으로 4도어해치백, 2도어 쿠페로 차체를 디자인하고 미쓰비시에서는 1.3L 80마력의 새턴엔진과 랜서의 샤시, 4단 수동변속기를 들여옵니다.

이렇게 시작한 개발은 1년 6개월만에 1974년 10월 완성되 당해 열린 55회 이탈리아 토리노 모터쇼에서 첫선을 보여 많은 관심을 끌게됩니다.

기아의 브리사와 GM코리아의 카미나등의 경쟁차종이 있었지만 국산화율 90%에
1975년 12월 울산공장에서 50대를 시작으로 본격생산된 1976년에는 1만726대 1977년 2만5천대 1978년에는 5만대로 한국의 도로는 포니물결로 넘쳐나게됩니다.

또, 1976년 7월에는 에콰도르에 5대의 포니를 시작으로 중동지역에 1천여대를 비롯해 칠레, 코스타리카, 영국, 네덜란드, 벨기에, 그리스 등에 소량을 수출했고 이런과정을 거치면서 다양한 기후에 맞는 자동차를 개발해야 한다는 노하우도 쌓게 됩니다.

비록 국내에서지만 큰 인기를 바탕으로 4도어 세단만이 아니라 3도어(1979년), 왜건(1979년), 픽업(1976년)으로 가지치기를 하고 1400CC 엔진과 자동변속기등을 장착합니다.

포니는 한국자동차공업이 외국자동차 회사의 기술종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준 의미외에도 초기 마이카 시대를 열어 80년대 폭발적인 자동차시장의 형성에 교두보를 마련했고 한국자동차수출 시대를 개막한 작은 영웅이었습니다.

포니 제원
길이*너비*높이 3970*1558*1360mm
휠베이스 2340mm
트레드 앞뒤 1278,1248mm
정원 5명
무게 870Kg
엔진형식 직렬 4기통 카뷰레터
굴림방식 FR
보어*스트로크 73.0*74.0mm
배기량 1238cc
압축비 9.0
최고출력 80마력/6300rpm
토크 10.8kg.m/4000rpm
연료탱크 45l
기어방식 수동 4단
기어비 1,2,3,4,R 3.525/2.193/1.442/1.000/3.867
보디 4도어 해치백
스티어링 볼너트
서스펜션 앞/뒤 스트럿/판 스프링
브레이크 앞/뒤 디스크/드럼
타이어 5.60×13-4PR
최고속도 155km
연비 14.2km/l
가격 227만3천270원

포니 생산기간 - 1975년 12월 - 198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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