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ny Story


1974년 6월. 현대 포니 개발을 의뢰 받은 주지아로가 시제차 1호를 보내왔다. 곧바로 고유 모델 1호차를 부상으로 내걸고 이름을 공모했다. 6만 장 가까운 엽서가 날아들었다. 당시 전세계적으로 고유 모델을 보유한 나라는 15개에 불과했다. 아시아에서도 일본에 이은 두 번째 고유 모델이었기 때문에 국민들의 관심도 매우 컸다. 응모 엽서에는 아리랑, 도라지, 무궁화 등 한국적인 이름이 제일 많았다. 포니라는 이름도 100여 편 정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유력했던 아리랑은 제외되었다.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들어 있어서다. 결국 엽서 정리를 맡았던 아르바이트 여대생들의 투표 결과를 따르기로 했다. 젊은 세대의 감각을 믿어보자는 취지였다. 그녀들은 조랑말을 뜻하는 포니를 골랐다. 주지아로가 보내온 디자인과 몽땅한 조랑말 꽁무니가 비슷하다는 점도 작용했다. 역사적인 '포니'라는 이름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포니는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대표 차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직간접적으로 포니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이든 사람이라면 손수 운전했던 포니에 대한 추억이 남아 있고, 택시로 거리를 누비던 포니를 탔던 기억도 있을 것이다. 젊은 세대라면 아버지 차에 대한 추억을 떠올릴 수도 있다. 포니를 모르는 세대라 하더라도 <친구>를 비롯해 간간히 영화에 등장하던 포니의 모습을 보고, '우리에게도 저런 차가 있었구나'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포니 신화는 고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으로부터 시작된다. 1967년 현대자동차 사장자리에 오른 정세영 명예회장은 포니 신화의 주역이다. 해외에서 그의 애칭 또한 '포니 정'. 1970년대 초 신진과 합작으로 GM이 들어오면서 현대의 입지는 좁아졌다. 살아 남는 길은 내수는 물론이고 수출로 활로를 트는 길밖에 없었다. 수출은 곧 고유 모델 보유를 뜻했다. 다국적 메이커와 공동 생산을 하면 고유 모델로 인정 받을 수 없다.

 

게다가 전세계에 같은 브랜드로 차를 팔기 때문에 해외 시장에 독자적으로 수출할 수도 없다. 결론은 고유 모델만이 살 길이었다. 외국 기술에 의존해 조립판매를 하면 쉽게 돈은 벌겠지만, 국내에서 번 돈을 고스란히 로열티로 갖다 바치는 꼴이다. 결국에는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독립된 자동차 메이커로 성장해야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고, 그 기준은 고유 모델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로 판가름 난다. 이를 절감한 정세영 회장은 곧 포니 개발에 착수했다.

 

1974년 이탈리에서 열린 토리노 모터쇼에 포니가 첫 선을 보였다. 전쟁으로 폐허간 된 나라로 기억되는 한국에서 고유 모델을 내놓은 데 대해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마침 1차 석유파동으로 소형차가 주목 받기 시작하던 때라 소형차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게다가 롱 노즈 패스트백 스타일은 당시로서는 최신 유행 스타일이었다. 폭스바겐 골프를 디자인한 주지아로의 작품이란 것도 관심을 끄는데 한몫 했다 1975년 1월, 이탈디자인으로부터 프로토타입과 설계도면을 모두 인수 받았다. 시제차를 만들어 1년 동안 까다로운 테스트를 거친 후 1976년 1월 본격 생산에 들어갔다. 국산화율은 90퍼센트에 이르렀다. 그리고, 1976년 2월 29일 출고가 시작되었다.

 

1천238cc 80마력 엔진과 4단 수동기어를 얹고 최고시속 155km를 냈던 포니는 패밀리카로서 국내 도로를 달리기에 딱 알맞은 차였다. 우리 체형에 맞았을 뿐만 아니라 소형차라 경제성이 높았다. 게다가 한국 최초의 고유 모델이라는 점이 작용해 포니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데뷔 첫 해 1만 대가 넘게 팔리면서 국내 승용차 시장에서 절반에 가까운 점유율을 차지했다. 1인당 국민달러 500달러 시대에 승용차 대중화 길이 열린 것이다. 마이카 시대의 시작이었다. 그 동안 조립생산 방식으로 생산된 중형차가 주름잡던 한국 시장에 소형차 시대가 열렸다. 포니는 이후 왜건과 픽업 등 다양한 모델로 가지치기 했고, 1.4리터 엔진과 자동기어를 얹는 등 꾸준한 성능 개선이 이루어졌다.


1976년 7월에는 에콰도르로 향하는 배에 포니 다섯 대가 올랐다. 한국차가 '현대'라는 자기 브랜드를 달고 처음 해외로 나가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제 3세계를 중심으로 포니의 수출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수출이 원만하지만은 않았다. 사우디에서 문제가 생겼다. 스티어링 휠이 휘고 글로브박스가 열을 받아 뚜껑이 동그랗게 말려 버리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게다가 비닐과 천으로 된 시트가 수축비율이 달라 오그라들고 터진데다가 타버리고 변색 되는 등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에 부딪혔다. 원인은 에어컨이었다. 먼지가 들어가면 엔진이나 에어컨이 제대로 작동을 못했고, 그 때문에 온도가 급상승했던 것이다. 실패였다. 이를 거울 삼아 보다 철저한 해외시장 조사가 이루어졌다. 1976년 20개국이던 수출국은 1979년 42개국으로 늘어났다. 세계 곳곳에서 'HD' 마크를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세계 유수의 자동차 메이커와 비교할 수는 없었지만 '자동차를 만드는 나라'라는 인식을 통해 우리의 국력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뒤늦게 자동차 산업에 뛰어든 한국 자동차 산업이 이제 세계 5위를 넘볼 정도로 성장했다. 그 원동력은 포니라는 고유 모델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 시장으로 뻗어나가기 위해서는 고유 독자모델은 필수다.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한국인 특유의 뚝심과 밀어 붙이기로 탄생한 포니는 한 기업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뜻 깊은 모델이다. 포니에서 포니2로, 다시 포니 액셀로 이어지던 포니는 이제 그 이름은 사라졌지만, 아직까지도 기억되고 있다.

 

우리 기억 속에만 남아있던 포니가 부활했다. 고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3주기를 맞아 추모사업의 일환으로 '포니 정 홀'이 문을 열었고, 그와 함께 포니를 소재로 한 대형 아트워크가 설치되었다. 가로 15미터, 세로 3미터 크기의 동판에는 실물 크기의 포니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제 도로를 달리는 포니는 볼 수 없지만, 영원히 녹슬지 않는 청동과 같이 포니의 존재는 우리 자동차 산업의 역사에 길이 남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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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 탑기어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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